검색

[김유혁 칼럼] “왜 忍之爲德이라 하는가”

가 -가 +sns공유 더보기

이영민
기사입력 2024-01-01

 

참는 것이 덕이 된다는 뜻을 인지위덕(忍之爲德)이라 한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덕담(德談)의 일종으로 자주 들어오곤 했다. 어디에서 보면 백번 참는 집에는 반드시 경사스러운 일이 넘쳐난다고 주련((柱聯)을 써 붙인 곳도 있다(百忍堂中必有餘慶).

 

그러나 일상생활에 있어서 모든 것을 참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생활이라는 것은 거의가 감정과 이해관계에 얽혀 있기 때문이다. 감정의 충격을 스스로 억제하고 손해나는 일을 스스로 감수하여 시시비비(是是非非)할 것을 일방적으로 포기한다는 것은 목석같은 사람에게서나 있을법한 일일 것이다.

 

이와 같은 시각에서 본다면 인내해야 할 이른바 마지노선은 어디까지라고 보아야 할 것인가? 다시 말헤서 어디까지가 참을 수 있는 한계선이냐 하는 것을 분명히 그을 수 있다면 인내(忍耐)에 의한 덕()의 세계와 부덕(不德)의 세계를 구분하기 용이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지위덕(忍之爲德)은 말로만 서로 주고받는 덕담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지위에 부응해야할 첵임 있는 사람의 경우일수록 인내(忍耐)야말로 고민해봐야 할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어려운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복잡한 국제사회적 상황 속에서 온갖 역경을 이겨나갈 수 있는 지혜를 깨우쳐준 당시의 논객 맹자의 학설을 음미해보면 인자(忍字)는 곧 자아승리(自我勝利)의 지름길을 열어주는 스승이었음을 알게 된다.

 

맹자 고자장(孟子 告子章)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하늘이 장차 큰일을 맡길 사람(天將降大任於是人也)에게는,

첫째, 반드시 먼저 마음을 괴롭힌다(必先苦其心志)

둘째, 육체적 고통을 느끼게 한다(勞其筋骨)

셋째, 배를 곯게 한다(餓其體膚)

네째, 생활을 궁핍하게 한다(空乏其身)

 

그와 같은 모진 시련을 겪도록 함으로서 그의 마음을 두들겨 그의 성격을 더욱 견인(堅忍)하게 단련시키며(動心忍性), 아울러 스스로 할 수 없다고 여기던 일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曾益其所不能)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자기 나름대로 성공했다고 믿는 사람치고 역경극복의 경험이 없는 이가 거의 없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겪어야 했던 그 역경 자체는 자기 성공을 결실 맺게 해준 원동력이었음이 분명하다.

 

자기 나름대로 사회적 책임을 느껴가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가 사회 각계의 지도급 인사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들은 모두가 사회적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책임의식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사회적 소임(所任)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소임수행(所任遂行)에 상응하는 어려움도 있다.

 

인지위덕(忍之爲德)은 바로 그 어려움을 풀어가기 위한 하늘의 계시(啓示)라고 믿어야 한다. 그렇게 믿는다면 마음이 편해질 것이며 아울러 괴로움의 기억도 반감(半減)되어 갈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난날의 고생이 도리어 보람 창조의 원동력이었으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체험이었다고 자랑거리가 될 수도 있다.

 

돌이켜보면 인자(忍字)는 칼날인() 밑에 마음심()자를 쓰고 있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일반적으로 참기 어려운 것은 첫째가 감정의 충격이요, 둘째가 이해의 충돌이다. 그와 같은 충격(衝擊)과 충돌(衝突)을 이겨가기 위해서는 마음의 칼날을 드려댈 수밖에 없디.

 

이성(理性)은 하나지만 이성을 무너트리려는 감정은 7가지나 된다 하여 이를 칠정(七情: 喜怒哀樂愛惡懼)이라 한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있거니와 감정의 표현이 적정선을 넘게 되면 이성을 해치게 된다. 그럼으로 지나친 부분을 도려내야 한다. 도려내야 한다는 그 부분이 곧 참아야 하는 자제(自制)의 부분인 것이다.

 

그리고 이해관계의 충돌 면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와 해()는 서로 양립될 수 없는 대립관계에서 시작된다. 일반적인 경우 이욕부분을 반쯤 주리고 동시에 피해부분을 또 반쯤 양보한다면 이해갈등관계가 근절되지는 않는다 해도 최소한 타협이 이루어질 수는 있다.

왜냐하면 큰 가치를 의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최소한의 중용지도를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인()의 논리를 찾는다면, ()의 의미는 이기론(理氣論)에서부터 출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직이 공자(孔子)는 특히 논어를 통하여 인()을 위주로 사상을 폈는가하면, 맹자(孟子)는 인에 의()를 더하여 인의(仁義)를 기본으로 사상을 펴 갔다. 다시 말하면 공자는 인의 사상을, 맹자는 인의를 각각 역설하였다.

 

따라서 맹자는 성선설(性善說)과 사단론(四端論) 및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주창하였다. 이에 영향을 받은 이퇴계(李退溪)는 처음에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주장하였다. 56세 떼에 이율곡(李栗谷)을 만나서 토론을 하기시작했다. 이율곡이 입장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었다.

퇴율(退栗) 두 분의 토론은 드디어 이기이원적일원론(理氣二元的一元論)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의 원천을 이기론(理氣論)에서 찾는다면 칠정(七情)이 중용(中庸)의 한계를 넘을 때 그 넘는 부분을 인삭(刃削)하고 감정의 표현이 도리어 미급할 때에는 그것을 끌어올려 이른바 완()의 개념을 충족(充足)시켜갈 수 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인()의 정도(正道)는 바로 서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의 정도가 바로 선다는 것은 사회적 갈등의 소지가 줄어들고 아울러 화이부동(和而不同)의 풍토가 성숙해져갈 수 있다는 뜻이다. 중용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 비리요, 부정이요, 비정상이라면, 다른 말로 표현해서 그런 것들은 모두가 참어야 할 인()의 정도(正道)를 벗어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디.

<저작권자ⓒ충청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
URL 복사
x

PC버전 맨위로 갱신

Copyright 충청저널. All rights reserved.